검색
문헌
검색 > 문헌 > 기사
음악 월평―채플린은 『모던 타임스』에서―
구분 표준화 정보 원문정보
기사제목 음악 월평―채플린은 『모던 타임스』에서― 音樂月評―촤푸린은 『모던·타임스』에서―
종    류 비평 批評
필    자 이호 耳豪
출처정보 인문평론 人文評論
연    도 1940-04 昭和十五年四月
면    수 298 (298)
기사
촤푸린은 『모던·타임스』에서, 機械를 製作한人間이 自己가맨든 文明의 聯軸器에 앂허서 屈服하고잇는 悲慘한꼴을 一■의 諷刺로서 呈示하얐다.
그것이 現代의 모든文化生活과 機械文明과의 均衡의攪亂에서 招致된敗北임은 이미 우리가 認知하는바고, 그것을 現代의 一般的性格으로 規定하고있는것도 事實이다.
아메리카의 映畵音樂이 個人的으로는 「藝術家」가아닌 音樂「專門家」가 모힌工場(撮影所)에서 製作되듯, 라디오, 레코─드가 音樂에 强要하는것은 말할것도없시 從屈的인 位置다.
現代의 文化生活이 容赦없이 音樂을 扡棄하므로써 機械(文明)에 짓밟히게하는것은 勿論 하나의 悲劇이 않일수없다
통조림(罐詰)이 食卓우에 올나야만文化生活의 한 씸볼로 生覺하는 「文化人」이잇듯, 레코─드나 라디오를 家具의하나로 작만하는것을 文化生活로 誤認하게까지된 오늘날, 기실 現代人의 목소리(聲帶)조차 마이크로폰 소리에 恰似하게 되여왔다. 말하자면 마이크로폰을通한 機械音에 귀를적씬 現代인의 音感覺은, 촤푸린의「모던·타임스」的屈服과다를것이없는것이다.
구루마꾼의 「노래가락」이나, 中學生의 「白蘭の歌」나, 女性아가씨의「浪花節」나, 或은 女給諸君의 「忘れちや嫌よ」는 모두가 마이크로폰的音質이다.
거리마다 李香蘭이가있고 渡邊はま子가 記濫한다. 이리해서 거리는 마이크로폰의 洪水로 뒤든적거린다.

現在 우리가 要望하는것은 깊은敎養에서붙어 演出한 合體主義의 活眼的適用이다. 文化(乃至音樂文化)란것은 決코 文明의 外的過程에있어얻는 技術的 總和가아니라 人間精神의 內部에있어의 精神의 姿態에 保累된것을 意味한다.
그러므로 音樂運動이 어떤 이데오로기─의 據點에서 政治的 織旗를내걸고 施行될때, 注意할것은 形式的인 陳薄한메토─드를 警戒할일이다. 將次 官廳이나或은 半官半民의 公的團體가 音樂에 對한 어떠한 協力을求하거나 또는 좀더 積極的인 態度로서 映畵令精神에 準據하야생긴 映畵人協會같은데서보듯, 音樂의 助長을 企畫할境過에있어서는 더욱 우에말한點을 銘心해야될줄믿는다. 머리속이비다싶이한 有名無實한 無能한 「音樂한다는친고」를 百名뫃은다하드라도, 音樂自體의 成長모멘트와 合體되지못할때는 音樂의 本質的인 成長은 到底히 바랄수없는것이다.
쉽게말하면 뿌리없는 꽃이나 나무가지로서는 길게 庭園을 裝餘할수없는것이나같다. 過去 數多의 音樂團體의 自滅과, 或은 現存한團體가 無能力한 事實은 그것의 證左가아니고 무엇이랴─ 朝鮮樂壇은 새로운 土壤과 물과 햇빛을갖여야할 時期에 置해있다.

레코─드 三月新譜는 質로나 量으로나 보잘것없는달이다. 콜럼비아는 이달부터 盤材料節約을 爲함인지 테스트盤을 내노치않는 關係로 筆者의 時間上 事情도있고해서 포리도─루新譜와함끼 이短評締切까지 듣지를못하야 不得已 割愛하기로했다.
빅타─에는 멘델스존의「三重奏曲」(D短調作品四十九)가 코르토오, 티보─, 카살스의 快演으로 드러있다. 이盤의레코─딩은 두번째 우려낸것이지만, 原來演奏가 傑出한것인만치 若干 舊盤이란다드라도 큰 흠이될것은아니다.
現在 世界레코─드界에서 各己錚錚한 第一人者의 合奏로된名演中의 名演奏이고, 이以上의 優秀한것을 求하기는어려운處地다.
이트리오의 레코─드로서는 빼─토호벤의『太公트리오』를 爲始하야 하이든, 슈─벨트, 슈─망等의것이잇지만, 이들이 얼마나 그奏法上에있어 또는 音樂的으로 휼늉한가를 찾어낼냐면 멘델스존의 D短調曲中 「스케르조」를 들어서 可히推知할수있다. 첫재 템포의 自由變轉과 微妙한 緩急과, 表現의彩色이 斷然光輝를 갖이고있다. 要컨대 이 트리오의 藝術的香氣는 浪漫的解釋의 完壁에있다. 그러므로 멘델스존과같은 로망派의 化身으로볼수잇는 作品에있어 가장完全한 圓熟味를 보여준다.
델레풍겐에는 크라이베르 指揮로된 「舞踏의勸誘」가있다. 原曲이 多分히 抒情趣味인데다가 크라이베르같은 女性的인딜리카시─와 情緖味를가진 指揮로된만큼 맑은 錄音效果와아울너 들을만한 盤이다.
이밖에 힌데밀트의 「비올라奏鳴曲」이있지만, 衛生的으로꾸며진 現代風인 아파─트의感에지나지않는 作品이고, 하이팻츠의 바이올린 獨奏 「헤부라이의旋律」과 역시 크렌캄푸의 獨奏 「까불드·로도」가 小品으로 빚날뿐이다.

前前달에 나는 이欄에서 李愛內의 피아노獨奏는 藝術的으로는 아직도 高度의境地에 到達한것이 아니라고 했더니만 거기對한 質疑를 받은일이있기에 몃마디 對答해두기로한다.
大體로 音樂과같은 演奏(演出)를 必要로하는 藝術은 原曲이 潔作이면일수록 歪曲되여 演奏되기가쉽다. 웨그러냐하면 어떻한曲을演奏할境遇, 大部分의 演奏者는 原曲의 뿌리를 演奏하지않고 오직 그 效果를華美하게 나타낼냐는 꿈에 빠저버린다. 그런탓으로 귀딱지만 技術을가지고 大家然할냐는 虛慾에저저서 왼통 原曲의美를 分解해버리고 마치 어린애 작난깜부시듯이 元型의 純美를 喪失케하고 마는때문이다. 李愛內의 피아노 技術은 前번쓴대로 높히(朝鮮的水準에서)評價하지만 어떤 주책없는 洋琴家의 盲信모양으로 大端할것은 決코없다 그러타면 차라리 筆者는 金元福이나 金메리를 藝術家인點에서 더높히사고싶다. 李愛內의 眞實力은 앞으로의 宿題로두는것이 그가 모처럼 外國서 硏讚을 쌓고온데對한 禮義로서 할소리도 더퍼둘냐든 老婆心이였든것이다. 말하자면 李愛內는 겨우『お孃さん藝」를 버서난것뿐이다. 하도많은 어리광이 演奏家가가듯한 이곳의 피아니스트 가운데서는 한段높히나섰을뿐이다. 精進을바란다.
이메일주소 무단 수집거부 권리침해신고 문의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