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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오락
구분 표준화 정보 원문정보
기사제목 예술과 오락 藝術과娛樂
종    류 논설 論說
필    자 김관 金管
출처정보 박문 博文
연    도 1940-04 昭和十五年四月
면    수 18 18
기사
머나먼 보이지 안는 地點을 가르치는것을 藝術이라고 한다면, 娛樂은 現在 서 있는 地點에서 맴을 도는 것이라고나 할까!
藝術이나 娛樂은 모두가 人間生活의 現在形을 벗어 날랴는 點에선 다른것이 없다.
人間은 恒常 自己가 살고있는「現在」에서 解放되기를 願하고 그것을 爲한 無限의 努力이 또한 있는것이지만, 모든 思考와 行動을 묶고있는, 習慣의 桎梏에서 빠저 날랴고 하는 곳에 藝術과 娛樂이 가진 職能이 고개를 내밀게 된다.
習慣에 얽힌 生活과, 緊張된 악루얄리티에서 一時的이나마 벗어날랴는 努力이 人間生活가운데는 있는 것이지만 藝術의 効用과 娛樂의 效用은 그点에서는 共通되는 面貌를 標示하고있다.

그러나 藝術은 한번 解放된 地點에는 다시 復歸하지 않으랴하고, 도리어 한걸음식 우으로 우으로 올라 감으로서 同一한 習慣生活에서 高揚하고있는 特異性을 갖지만 娛樂은 마치 고무줄을 느렸다가 도로 놓은 때나 마찬가지로 한때의 弛緩──緊張에서 풀린 生活을 가져서 금시 도루 제 地點으로 돌아오는것이다.

娛樂을 幸福으로 通하는 入口라고 나는 말한적이 있으나 藝術보담 多彩하고 찬란하긴 해도 그反面 陶醉的이고 感情的인 것이다.
어느것이고 人生에 있어는 必要한 것이라 해도 藝術은 깊고 娛樂은 얕은것이라고 形容할수 있는것같다.
娛樂의 藝術性은 때를 가리지않고 論議되는 問題지만 실상 그렇한 論攷는 좀더 道義的인 모랄리티─우에서 解究되야만 그 本質을 밝힐수 있을것같다.

娛樂이고 映畵고 그것의 藝術性과 娛樂性이 混同되고 있는상십흐나 其實인즉슨 우리가 希求하는 音樂, 映畵는 娛樂인 同時에 훌륭한 藝術이여만한다. 音樂이나 映畵가 單純히 娛樂에만 一貫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安價의 生活感情에 不過하고, 音樂會나 映畵舘에서 베풀어지는 몇 時間의 逸樂을 主로한 餐宴이라서 단지 感情의 浪費가 아니면 安逸한 逃避에 끄칠 따름이다.
藝術가운데는 人間에게 反省을 要求하는 無言의 挑戰이 있으나, 娛樂은 現在滿足으로서 끝이고말 危險한 誘感이있다.

現在에 滿足한다든지 瞬時的으로 現實生活을 벗어나므로써, 忘却할수있다고 生覺하는 態度는, 藝術이 언제나 새로운 「눈」을 人生에 푸라스 해가는대 比해선 하나의 뚜렸한 敗北가 아닐수 없다. 그러므로 娛樂가운데 藝術的인 精神을 追求하는 理由는 그러한곳에 두고 나가야할줄 안다.
人間의 社會生活에 있어선, 娛樂의 效用이 어떻한 目的을 爲하야만, 있을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던지 藝術로서 發達되가야만 할일이다. 다시 말하면 娛樂과 藝術의 結合統合은 一錢銅貨가 가진 兩面과 같이 두개─藝術과娛樂 이 하나의 生活어의 兩面을 造成하므로써 깊은 關聯을 가진 統合이야 할일이다.
사람들은 흔히 娛樂을 人生에서의 숨박꼭질로 밖엔 더 깊이 生覺하려 하지않으나, 娛樂의 時代的 情景과 社會的意義를 無視하고선 그것의 效用이나마 解明할순 없는것이다.
一部 映畵製作者의 意見대로 映畵에는 爲先 娛樂性을 認定한다손 치드라도 그 娛樂性의 精神과 밋 位置가 瞹眛한 것이어서는 問題가 되질않는다. 이를테면 宣傳映畵나 或은 어떤 特定한 目的을 扮飾敷衍할랴는 映畵에서 娛樂性을 맡아낼수 없음과 같이, 娛樂에는 반드시 藝術的인 反省과 衝擊이 있어야된다.

그러므로 藝術을 人間生活의 基礎的인 底邊이라고 보면 娛樂은 그 底邊우에 造成된 하나의 塔일줄안다. 이렇게 生覺하고보면 藝術을 떠나선 眞正한 娛樂이 있을수없고, 따라서 恒常 밑바탕에서 새로운 榮養分을 吸取하면서 자라나가는 곳에 娛樂의 健康性은 約束되는것이다.
다시 되풀이 되지만 娛樂이 人間의 幸福에 다다르는 外城의 門이면 藝術은 그길을 한걸음 앞선 內城의 門이라고 할수있을것같다. (三月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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