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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중선
구분 구분 표준화 정보 원문정보
이    름 이화중선 李化中仙
출처정보 조선창극사(서울:조선일보사출판부) 朝鮮唱劇史(京城:朝鮮日報社出版部)
필    자 정노식 魚鳥同室主人
연    도 1941 昭和十五年
연    수 247 二四七
인물
李化中仙
李花中仙은 距今 四十二年 前에 慶尙南道 釜山에서 出生하였다. 貧窮한 家庭에서 辛苦艱難하게 잘아나서 十七歲에 全北 南原郡 水旨面 好谷里(홈실) 朴氏 門中으로 出嫁하여 밭 매고 井臼 질삼 하고 물 깃고 방아찢기 村婦의 職務를 지켜왔던 바 때 마츰 홈실에 들어온 協律社가 數日 밤을 興行하게 되었다. 홈실 洞民들은 男女老幼 할 것 없이 처음 對하는 이 協律社 求景을 누구나 앞을 다투어가며 하게 되었는데 그 中에는 花中仙도 婦人네들과 함께 끼여 있게 되었다. 生前 처음 對하는 風樂 소리도 그의 耳目을 恍惚케 하였으나 광대와 妓生들의 唱劇은 한 層 더 그의 心神을 眩惑케 한 바 있었다. 이윽고 劇이 끝나고 그가 집으로 발을 옮길 제는 그의 가슴 속에는 어느 듯 自己의 거러갈 길이 茫然하였다.
協律社의 興行은 三日 동안 繼續되었는데 한 時間도 빼치지 않고 구경꾼의 자리에 참예한 사람은 오직 李花中仙이었다. 시굴 구석에서 더구나 구차한 집에서 자라난 어린 사람으로서 이러한 것을 볼 때에 광대나 妓生들의 몸 맵씨라던지 옷 입은 것은 仙官이나 仙女같이 생각되여 虛榮心이 일어나는 것은 勿論 普通 사람의 心情이라 花中仙의 마음 가운데도 虛榮心의 發作이 始作하였을지나 實狀은 그보다도 特別히 그 어린 마음속에 싹트기 始作한 것은 광대나 妓生들이 노래 불으는 여러 가치 唱劇이었다. 原來 그가 音樂에 天才라 할 만한 머리를 가진 것이 여기에서 證明된 것이다. 自己도 소리를 배워서 부른다면 저 사람들만 못할 것이 어디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자 만일 自己가 소리를 배워 여러 사람 앞에서 소리 높여 불을 때면 여러 사람이 얼마나 滋味있어 할 것이며 또한 얼마나 自己를 칭찬하여 줄까 하는 名譽心까지 생기는 空想을 하게 되었다. 協律社 一行이 단여간 後에 몇일 동안은 그러한 생각에 골돌하여 물을 길러가나 밥을 짓는 동안이나 잠을 잘 때에도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空想과 空想이 덧쳐 가지고 먹고 자는 것이 不安하고 失性한 사람처럼 몇을 동안 몹시 煩悶하다가 畢竟은 소리를 배워야 하겠다는 굳은 決心을 가지게 되었나니 이것이 그 當時에 있어서 到底히 行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홈실 朴氏네의 兩班집 며누리로서 이러한 일을 한다는 것이 남의 耳目은 姑舍하고 自己 스스로 돌아보아서도 取捨하기에 주저 아니 할 수 없다.
그러나 소리를 배워야 하겠다는 決心 밑에는 兩班이고 기와집이고 男便이고 體面이고 모다 헌- 신짝쳐럼 집어던지고 몇 가지 안 되는 옷을 싸가지고 아무도 몰으게 밤중에 南原邑을 向하여 逃亡하게 된 것이다. 홈실서 南原邑이 二十里밖에 안 되는 길이나 고개를 넘고 냇물을 건느는데 千辛萬苦로 邑에까지 들어갔다. 그러나 어디 가서 어떤 사람에게 배워야 하겠다는 目的도 없이 定處도 없었다. 어려서부터 노래는 才人에게 배운다는 소리를 들은지라 인해 才人의 집을 찾아가기로 하여 이리저리 찾는 中에 어떤 老婆의 案內로 무당의 집에 가게 되었다 한다. 그 집에 들어가서부터 쉬지 않고 소리를 배웠다.
무당의 생각에는 풋소리깨나 가르쳐서 色酒家나 妓生으로 팔아먹으려는 心算이었다. 아무쪼록 손님에게 아양을 부리고 돈을 긁어 오라는 付托이었다. 그러나 花中仙의 마음에는 소리를 배우려는 것이지 決코 몸을 팔려는 생각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한 소리에는 귀도 기우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南原邑에 사는 張得周란 사람이 있는데 광대로서 소리는 名唱이라 할 수 없으나 本來 배우기를 有名한 광대에게 배웠기 때문에 調格이 매우 높아 當時 南原邑에서는 一流라 하는 이름을 얻었었다. 그이에게 배우려 하는 생각이 꿀 같으나 機會를 얻지 못하고 主人인 무당이 또한 防害를 하므로 어찌할 道理가 없었다. 마침 張得周의 동생 張赫周라는 者가 있는데 차라리 그 者와 夫婦의 關係를 맺는 것이 빠른 길이라 생각하여 媒婆도 없이 親히 그 사람과 만나 佳約을 맺게 되었다. 이러고 본즉 무당도 妨害할 건턱이 없고 張得周는 또한 弟嫂라는 因緣으로 精誠것 自己의 抱負를 모다 털어서 熱心으로 가르치게 되었다. 本來 재조가 있었고 또한 그러한 熱誠이 있는 탔으로 不過 數年에 重要한 판소리는 모다 끝을 떼게 되었다. 終末에는 靑出於藍이라는 稱譽를 받을 境遇에 到達하였다. 그러자 張氏와도 그만 갈러서게 되자 다른 사람의 小室로 들어가서 얼마 아니 되는 동안에 四五百石의 收入을 얻게 되었다. 그동안 홈실 朴氏 村에서 야단이 나고 그를 찾기에 血眼을 움지기었으나 이미 이렇게 된 以上 다시 얻지 아니하였다.
그 後에 南原邑에서도 살 수가 없게 되여 모다 집어치우고 서울로 올라와 朝鮮券番에 妓籍을 두고 妓生 노릇을 하였는데 一時 長安 風流郞들을 陶醉케 맨든 것은 누구나 잘 아는 事實이다. 京城와서는 宋萬甲, 李東伯 等의 巨匠들의 指導를받아 더욱 精進에 힘 쓴 까닭으로 至今은 斷然 半島 女流 唱劇界 一面의 覇權을 잡은 것이다.
그는 歌女의 常格인지 얼굴은 一見에 醜薄에 가까우나 聲音은 絶等하게 美麗하다 水湧山出로 거침없이 어름에 박 밀듯 하는 솜씨다. 소리를 彫作하지 아니하고 自然에 맡기어서 그저 나오는 대로 하여도 規矩準繩에 틀림이 없이 流暢하게 잘 한다 이 點은 他人의 미치지 못할 點이다. 그러나 듣는 刹那間에 愉快함을 느낄 뿐이지 듣고 나서는 記憶이 남아 있지 아니한다. 그것이 長點인 同時에 또한 短點인가 한다. 그의 所長으로 蓄音機에 吹入된 것이 數種잇어 世間에 流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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