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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만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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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송만갑 宋萬甲
출처정보 조선창극사(서울:조선일보사출판부) 朝鮮唱劇史(京城:朝鮮日報社出版部)
필    자 정노식 魚鳥同室主人
연    도 1941 昭和十五年
연    수 183 一八三
인물
宋萬甲「東便」
宋萬甲은 全北 求禮郡 鳳北里 出生이다. 名唱宋雨龍의 嗣子요 朝鮮名唱 中 第一指를 屈하는 宋興祿은 그의 從祖이다. 이러한 名門後裔로 七歲부터 그 父親의 敎導 下에서 노래 工夫를 始作하였다. 그 아버지를 따라 봇다리를 짊어지고 名山大川 勝地를 찾아 단니며 배웠다 한다. 天才的 姿品을 타고 난 그는 工夫가 日就月將하여 十三歲時에 이미 名唱으로 聲名이 藉藉하였다. 그러나 唱調와 製作이 家門의 傳統的 法制를 밟이 아니하고 一種特色의 製作으로 別立門戶하였다. 그것은 時代的 要求에 順應하기 爲하여 通俗化한 傾向이 많었다 그러므로 그 父親은 宋氏 家門 法統을 抹殺하는 悖戾 子孫이라고 해서 毒藥을 먹여 죽이려고 한 일도 있었다. 父子 間에 各其 主張을 달리하는 만큼 理論鬪爭으로 不和하여 畢竟은 집에서 쫓겨나서 朝鮮八道를 돌아다니며 소리를 하였다. 그래서 그의 唱劇은 더 한층 널리 퍼젔던 것이다. 宋氏 말하기를 「唱劇家는 紬緞布木商과 같아서 비단을 달라는 이에게는 비단을 주고 무명을 달라는 이에게는 무명을 주어야 한다」고 主張하였다. 紬緞과 같은 古法만 가지고는 現代 大衆的 要求에 適應할 수 없다는 意味가 아닌가 한다. 舊韓國時節에 隆熙皇帝께서 朝鮮聲樂의 發達을 期하기 爲하여 圓覺社를 西大門內에 設置하고 當時國唱 金昌煥 宋萬甲을 幹部로 하고 副社長이 閔泳煥이었다. 그래서 그 前日까지는 春香歌나 沈淸歌가 노래로만 있었고 劇으로는 化하지 못한 것을 二百七十餘名의 人員으로 現代的 唱劇을 構成하여 大規模로 演行하였다. 今日 興行하는 春香歌나 沈淸歌가 그때 圓覺社에 構成한 것을 模仿한 것이다. 이것으로 보아서도 그가 朝鮮舊樂에 끼친 功績은 多大한 바 있다. 圓覺社는 當時 國立劇場 或은 皇室劇場으로 볼 수 있는데 不幸이도 三年 後에 解散하고 말았다. 李載覺 全羅監 使時에 參奉職을 받았고 圓覺社 時節에 御殿에서 屢次 소리를 하여서 우에서 嘉賞하시고 監察職을 除授하였다. 圓覺社가 解散되자 宮內府 別巡檢의 實職을 擧行하다가 三個月後에 解任되었다. 그 後에는 소리 修鍊과 弟子 敎育에 힘을 쓰고 晩年에는 李東白 丁貞烈과 같이 朝鮮聲樂硏究會를 設立하여 朝鮮聲樂의 向上發展에 餘生을 받쳤고 많은 男女弟子를 가르쳤는데 聲樂硏究가 今日의 發展을 보게 된 것은 氏의 功勞가 많다고 한다. 그의 門徒中에는 金正文 金光淳 朴綠珠와 같은 錚々한 이가 있고 그 外 直接 間接으로 가르친 數肴가 無慮 千餘名에 達한다고 하며 朝鮮 各處에 無數한 광대와 妓生들이 氏의 唱法으로 노래를 부른다고 한다. 報酬없이 가르친 弟子가 半以上이고 親舊의 艱狀을 보면 自己의 입은 衣服이라도 버서서 주는 義俠心이 豊富하므로 一層 親舊들과 門徒들의 尊敬을 받었다 한다. 그가 가장 잘 하는것은 春香歌 沈淸歌 赤壁歌 中 華容道場面이다 中年에 喪妻한 後로는 沈淸傳의 沈봉사가 喪妻하고 沈淸을 안고 다니며 乞乳하는 대목을 당하면 마치 自己 環境을 말하는것 같아서 목이 메여서 소리가 나오지 아니하므로 沈淸歌는 廢止하고 우슴 場面이 많은 박타령을 많이 불렀다고 한다. 二男과 孫子 男女 合 七人이 있는데 子孫 中에 그의 系統을 이워갈 만한 이가 없다 하니 血統은 있으나 歷史的 唱統은 後繼가 끊어지고 말었으니 爲하여 歎惜한 일이다. 今年 一月一日에 京城 往十里에서 死하니 享年이 七十四歲이다. 氏는 當世 名唱 中 異彩를 放하던 巨星이다 名門의 後裔로 그 傳統的 法制를 不踏하고 一種 特色의 調格을 創始하여 一家를 完成하였다. 特徵이 있는만큼 異彩를 放하였고 異彩를 放하므로 人氣는 集中되었다. 東派의 系統을 維支하는지 모르거니와 동글고 맑은 通上聲으로 내질러 떨어트리는 聲調는 果然 前人 未踏處를 開拓하였다. 古法에 拘泥치 아니하고 新方向을 찾어낸것이 藝術家의 本色인 同時에 時代的 要求에 適應할 것이다. 與世趨移의 應變이라고 하면 그리 恠異역일 것도 없다 그러나 曲調의 變化가 그리 없고 안일이가 不足하다 一句一節에 너머 힘을 쓰므로 全體를 統括하여 가는데 遺漏가 없지 아니한가 한다. 美玉의 瑕疵 있음을 歎惜할 바이다 七十餘歲 老齡으로 能히 舞臺에 서고 能히 라디오로 放送하며 地方巡囘演奏는 그 精力이 壯하거니와 平日得音의 所致인가 한다. 古典에 精通하거니와 春香歌 中 農夫歌 一篇은 넉넉히 그의 더늠으로 後世에 傳할줄로 믿는다. 各種 더늠이 蓄音機에 吹入되었거니와 이에 農夫歌 一節을 左揭하노라.
「이때는 어늬때냐 四五月 移種時라 農夫들이 모조리 대삿갓 쓰고 도롱이 입고 넓은 들에 三三 五五 떼를 지어 移秧聲이 浪藉하고나.
두리둥둥 꽹매꽹 어널널널 상사뒤여--어-여-루 상사뒤여」
「仙李乾坤 大平時節 康衢微眼 童謠 듣는 요님금이 버금이라」
「두리둥둥 꽤매꽹 어-여-루 상사뒤여」
「리음양 순사시는 삼정숭 육판서 대관님네 직분이오」
「어여루 상사뒤여」
「庠序學校 베푸른 聖訓을 배우기는 道德君子 할일이오」
「어-여-루 상사뒤여」
「花間陌上 늦인 봄에 走馬鬪鷄 논일기는 豪俠少年 할일이라」
「어-여-루 상사뒤여」
「大丈夫 세상에 나 할일이 많건마는 우리農夫들은 일만 하고 밥만먹고 술만먹고 잠만잔다」
「어-여-루 상사뒤여」
「南田北田 기경하여 함포 고복 하여보세 어-여-루 상사뒤여」
「여바라 농부야 말듣거라 千里駿騣 채를 처서 天下名勝 구경하고 胸海가 훨씬 넓어 萬古文章 된연후에 到處마다 雄詞 健筆 驚動一世 하는것도 대장부의 일이로다」
「두리둥둥 꽤갱막 어널널널상루사뒤여」
「이애 농부야 다 듣거라 페랑이 꼭지에 桂花를 꽂고서 막우잡이 춤이나 추어보자」
「어-여-여-여루 상사뒤여」
「이논 배미를 어서 매고 장구배미로 건너가자」
「어여루 상사뒤여」
「서마지기 한 배미 반달 만큼 나멋네 네가 무슨 반달이냐 初生달이 반달이제」
「어여루 상사뒤여」
「저것보게 걸인 오네 도포는 어인일고 개잘량이 제격이라」
「어여루 상사뒤여」
한참 이리할제 어사또 주령 집고 이만하고 서서 농부가를 구경하다가 거기는 大豊이고 또 한편을 바라보니 중씰한 노인들이 찌리찌리 모아서 등걸밧을 이루난듸 갈멍덕 수게 쓰고 소시랑 손에 들고 白髮歌를 부르난듸
「등장가자 등장 가자 하난님전 등장 가세 무슨 연유로 등장 가랴 늙은이는 죽지말고 젊은 사람 늙지 말게 하난님전에 등장 가세 원수로다 원수로다 백발이 원수로다 오는 백발 막으 랴고 右手에 독기 들고 左手에 가시들고 오는 白髮 뚜다리며 가는 紅顔 거러당겨 靑絲로 結縛하여 단단히 졸나매되 가는 紅顔 절로오는 白髮은 時時로 돌아와 귀 밑에 살 잡히고 거문머리 백발 되니 조여청사 모 성설이라 무정한 게 歲月이로구나 少年行樂 깊은들 왕왕이 달아가니 이아니 光陰인가 千金駿馬 잡어타고 長安大道 달리고저 만고강산 좋은 경개 다시 한 번 보고지거 絶代佳人 곁에 두고 百萬嬌態 놀고 지거 花朝月夕 四時佳景은 어둡고 귀가 먹어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어 하 일 없는 일이로세 슬프다 우리벗님 어디로 가셨난고 九秋丹楓잎 긴듯이 선아선아 떨어지고 새벽하늘 별 진듯이 삼오삼오 시러지니 가는 길이 어듸멘고 어여루 가랴질이야 아마도 우리人生 一場春夢인가 하노라」
한참 이리할쩨 한農夫 썩나서며 「담배 먹세 담배 먹세」 갈멍떡 수겨쓰고 두던에 나오더니 가죽쌈지 빼여놓고 담배에 새우침을 뱉어 엄지가락이 잡빠라지게 빗빗단단히 넣어 집불을 뒤저놓고 火爐에 푹찔러 담배를 먹난듸 농군이라 하는것이 대가 빽빽하면 쥐색기 소리가 나것다 양볼택이가 옴옥옴옥 코궁기 발심발심 연기가 훌훌나게 푸여물고 나서니 어사ㅅ도 반말하기는 공성이낫제 「저농부 말좀 물어보면 좋겠구만」
「무삼말」
「이골 춘향이가 본관 수청들어 뇌물을 많이 받어먹고 만정의 작펴한단말이 옳은지」
저농부 열을 내여
「게가 어디 삽나」
「아문데 사던지」
「아무데 사던지라니 게난 눈콩알 귀콩알이 없나 지금 춘향이를 수청 아니 든다하고 형장 맞고 가쳤으니 娼家의 그런 烈女은세상에 드문지라 옥결 같은 춘향몸에 자네같은 동낭치가 누설을 찌치다는 빌어먹고 굶어뒤어지라 올나간 이도령인지 삼도령인지 그놈의자식은 일거후 무소식하니 인사가 그렇고는 벼살은 커니와 내좃도 못하제」
「어 그게 문슨 말일고」
「웨 어찌됨나」
「되기야 어찌될가마는 남의 말로 구십을 너머고약히 하는고」
「재내가 철 모르는 말을 하매 그러체」
이렇게 수작할 때에 한농부 나서며
「웃읍고 신거운 자식 다 보겠다 얻어먹은 비렁방이 여석이 반말지그러기가 웬일이야 저런여석은 근중을 알게 서를 쉰대짜빼어 줄까보다」
하고 불량한 눈을 브라리니 그중에 늙은 농부 하나가 힐끗 어사또를 보더니
「아서라 그 말 마라 그분을 솜솜이 뜯어보니 주제는 허술해도 손길을 보아하니 양반일시 적실하고 세포짜락이 과히 물맥은 아니로세 저런 것이 어사 같아서 무서우니라」
한 농부 픽 웃으며
「영감 너머 아는 체마오 손길이 희면 다 양반인가요 나는 이놈을 뜯어보니 움 속에서 송긋질 만하던 갓밧치 아들이 분명 하오」
하고 하하 웃었다.
「허허 망신이로군 그런 말은 다 웃으랴는 말이거니와 나는 본래 서울사람으로 소간 있어 남원에 오거니와 본관이 명관이라지」
좌중이 모도 웃는다 한 늙은 농부 얼굴을 찡그리며
「명관이지-밝은 명짜 명관이 아니라 어둘명짜 명관이지」
「그 어찌 그러하오」
「본관이란양반이 쇠를 매우 좋아하는 양반이지오 송사야 옳거나 그르거나 돈만주면 이기어주고 돈이라면 아희고름에 채인것 까지 씨 없이 긁어 가는데 南原四十八面에 록돈한푼 안 남았고 이대로 가면 일후에는 아히들은 돈 얼굴도 못 보지오」
「어허 민세 말아니오」
다른 농부 나얹어 가래춤을 탁 뱉으며
「돈도 돈이 어니와 봄철에 每戶에 鷄卵한개씩 주고 가을에 軟鷄한마리씩 받이라 하고 監營에서 환상 한 섬 타오면 말가웃씩 떼어먹고 세곡 한 섬에 열량하면 관수 값은 열두양 받고 鄕校소임 값 받고 하기깍고 소임 파니 이러고 백성이 살 수 있오」
또 한 농부 나앉어
「그나 그뿐이오 貪財好色이 아모리 한테붙은 문자기로 본관처럼 호색하는 이가 어디있단 말이오-기생이나 히롱하는 것이야 누라 말하겠오 마는 반반한 계집만 눈에 띠우면 사족을 못 쓰고 기어코 일을 내이니 남원관속의 계집하나 성한 것 없지오 그나 그뿐인가 수절하는 계집애까지 훼절을 하라고 따리고 가두고 춘향이도 그 약질인 것이 인제 장하원혼이 될 터이니 그런 殃及子孫할일이 또 어디 있오」
한 농부 담배때를 홱-내던지고 돌아앉으며
「본관도 본관이려니와 구관의 아들 이몽룡이란자가 원체 줄일 놈이지오 그놈이 배옥같은 춘향이를 꼬이어 백년가약을 정하여놓고는 한번 서울 간뒤로 인해 소식이 없어 춘향이가 저렇게 죽게 되어도 일행 모른 체하니 도시 그런 행세가 있단 말이오 그놈이 남원땅에 발을 들여 놓는 날이면 다리를 작신 분질어 놓련만은 어무정 맹낭한 아히여석이 더 있겠나」
「허 민정이 말 아니로군」
이렇든 수작을 파하고 돌아서서
「농부네들 일 잘하오」하고 한 모통이를 돌아드니」 云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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