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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흥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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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
구분 |
표준화 정보 |
원문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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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
모흥갑 |
牟興甲 |
출처정보 |
조선창극사(서울:조선일보사출판부) |
朝鮮唱劇史(京城:朝鮮日報社出版部) |
필 자 |
정노식 |
魚鳥同室主人 |
연 도 |
1941 |
昭和十五年 |
연 수 |
28 |
二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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牟興甲 「雪上의진저리친듯」
牟興甲은 京畿道 振威郡 出生으로 (或云 竹山郡 出生 或云 全州郡 出生) 純憲哲三代를 歷過한 人이다. 宋興祿, 廉季達과 幷世하여 一世를 振撼한 巨匠이다. 平壤 練光亭에서 판소리를 할 때에 덜미소리를 질너내여 十里 밖까지 들니게 하였다는 有名한 이야기가 있고 赤壁歌에 特長하여서 當時 赤壁歌에 있어서는 他人은 그 앞에서 敢히 開口치 못하였다 한다. 晩年에 全北 全州郡 亂田面 貴洞에서 餘生을 보내었는데 八十餘歲까지 享壽하였다. 後世에 傳한 더늠은 有名한 春香歌 離別歌 中
「여보 도련님 여보 도련님 날다려가오 날다려가오 나를 어찌고 가랴시요 쌍교도 싫고 독교도 싫네 어리렁 충청 거는단 말게 반부담 지여서 날다려가오 저건네 느러진 長松 깁 수건을 끌너내여 한끝은 낭기 끝끝에 매고 또 한끝은 내목 매여 그아래 뚝 떠러저 대롱대롱 내가 도련님 앞에서 자결을 하여 영이별을 하제 살여 두고는 못가느니」 云云 全道成 倣唱
이것을 「강산제」라고 한다. 이 내력에 대한 한 揷話가 있으니 牟氏가 晩年에 全州郡貴洞에 살적에 어던 날 買物의 必要가 있어 全州府 市場에 들어가서 要件을 마치고 돌아가는길에 多佳亭에 數千의 群衆이 環堵함을 보고 웬 일일가 하고 훼치고 들어가 본즉 當時 名唱으로 聲名이 錚錚한 朱德基가 소리를 하는데 聽衆의 지수 「얼시고 절시고 좋다」는 소리 四方에서 이러난다 牟氏 메였든 굴억을 깔고 삭갓으로 遮面하고 隱身하고 앉아서 興味있게 듣는데 歌唱을 마치자 滿座는 「宋興祿, 牟興甲의게 내리지 아니할 名唱이라고」嘖嘖稱道하였다. 朱 은근히 快感을 이기지 못하여 「牟興甲은 不足掛論이요 宋興祿도 猶不足仰視라고」自尊自讚的言辭를 敢發하였다 따라서 滿座는 모다 그當然함을 肯許하였다. 牟氏 듣기에 甚히 不快하여 그괘심할을 詰責하기 爲하여 디디여 座席에 들어섰다. 舊知들에게 拜禮한즉 滿座는 그意外임을 놀래 歡迎하였다. 牟氏 말하기를 「自己는 不足論이로되 宋興祿은 自他가 共認하는 大家이요 歌王의 稱號까지 받은 空前絶後의 名唱이어늘 朱의 所爲 無禮莫甚하다」하고 前記 離別歌 一曲을 前齒가 沒落한 唇音으로 壯快하게 부른후에 朱氏다려 한번 倣唱하여 그勝點을 表示하라 하매 朱 元來 宋, 牟 兩人의 鼓手로 多年 隨行하던 사람이라 僕僕謝罪하고 敢히 그앞에서 開口치 못하였다. 이것이 그調가 特異하고 아름다운것이 他人의 및이 못할바이라하여 朱氏의 倣唱으로 傳播되어 有名하게도 前齒沒落의 唇音으로 模倣하여 後世까지 부르는 더늠이다.
말이 先後를 잃었으나 憲宗時代에 氏의 名唱을 褒賞하기 爲하여 同知의 職階를 授하였다. ** ‘「雪上의진저리친듯」’은 ‘「雪上의진서리친듯」’의 오자인 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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