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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흥록
구분 구분 표준화 정보 원문정보
이    름 송흥록 宋興祿
출처정보 조선창극사(서울:조선일보사출판부) 朝鮮唱劇史(京城:朝鮮日報社出版部)
필    자 정노식 魚鳥同室主人
연    도 1941 昭和十五年
연    수 20 二○
인물
宋興祿
廬山瀑布 呼風煥雨의 宋興祿 歌王의 宋興祿
宋興祿은 全羅北道 雲峰 碑殿里 出生으로 李朝 純憲哲 三朝를 經歷한 人이다. 모든 歌調의 集大成한 功勞로 보아서 技倆의 特出한 點으로 보아서 劇唱의 中始祖이다. 그 天資의 高邁한 것과 技藝의 絶倫한 것과 抱負의 浩大한 것이 到底히 後人의 미치지 못할 곳이었다. 그러므로 同輩의 名唱 牟興甲은 先輩로 極히 推尊할 뿐 아니라 歌王의 稱號까지 바쳤다 한다.
그 妹夫 金成玉에게 진양조를 처음 듣고 그것을 多年鍊磨하여 그 完成이 極致에 이르렀고 羽調, 界面 其他 모든 것이 神域에 들어섰다. 진양조 完成에 關한 한 挿話가 있는데 그 挿話를 말하자면 먼저 孟烈에 關한 戀愛談으로부터 始作하는 것이 順序일 것이다.
宋氏가 처음 工夫를 마치고 世間에 나와서 名聲이 遠近에 퍼지자 大邱監營에 불려가서 소리를 하는데 名唱이란 칭찬이 滿座에 넘쳤으되 人物과 歌舞의 一等名妓로 當時 守廳으로 있는 孟烈의 입에서는 한마디 잘, 잘못의 評이 없었다. 宋氏가 그 曲折을 알지 못하여 그 이튿날 孟烈의 집을 찾아가서 그 母에게 孟烈을 좀 보게 하여 달라고 懇請하여 무슨 핑게로 孟烈을 불러 나오게 하였다. 그리하여 宋氏는 孟烈에게 어젯밤 소리판에서 한마디의 評이 없은 것을 물으니 孟烈은 웃고 그대의 소리가 名唱은 名唱이나 아직도 未盡한 대목이 있으니 피를 세 동우는 더 吐하여야 비로소 참 名唱이되리라고 한다. 宋氏는 그 길로 自己 故鄕인 碑殿으로 돌아와 그곳 瀑布 밑에서 다시 工夫를 시작하고 목을 얻으려고 소리를 지르는데 몇일을 지난즉 목이 아주 잠겨서 당초에 터지지 아니한다. 그렇게 석 달을 고생하다가 하루는 목구멍이 섬섬거리며 검붉은 선지피를 토한 것이 거의 서너 동우 폭이나 되었다. 따라 목이 터지기 시작하여 畢竟 瀑布 밖으로 소리가 튀어나게 되었다. 그 뒤에 다시 大邱에가서 宣化堂에서 소리를 하는데 소리도 소리러니와 一段情神은 孟烈의 動靜을 살피는데 集中이 되었다. 孟烈은 넋을 잃은 사람같이 座不安席하면서 宋氏의 입만 치어다보고는 무엇이라고 하여 옳을지를 모르는 모양이었다. 孟烈은 한 時間이 멀다하고 소리판이 끝나기를 기다려 監使에게 무슨 핑게를 하였던지 몸을 빼쳐 宋氏의 處所로 나와서 그 밤으로 行裝을 차려가지고 大邱를 脫出하여 宋氏의 故鄕인 雲峰으로 왔다. 孟烈은 本來 女子의 本能인 妬忌性이 强하여 宋氏가 어디던지 불려가게 되면 반드시 回還할 日字를 確定하여 만일 하루라도 어기는 일이 있으면 집안은 風波의 渦中에 휩쓸리고야 마는 것이 別로 珍奇한 일이 아니었다. 한번은 晋州兵營에 불러가게 되었는데 往還 二十日 作定한 것이 여러 가지 事故로 二三日間을 더 遲滯하게 되었다. 宋氏는 곧 그리된 사련를 細細히 적어 專人을 하였다. 孟烈은 그 편지를 떼여보지도 아니하고 그 專人에게 宋氏의 來不來를 묻고 하는 말이 내가 이 편지를 떼여볼 것도 없으니 宋광대에게 가서 가드라고 말하라 하고 곧 보찜을 쌓가지고 나선다. 專人이 하도 어이가 없어 그 길로 돌아와서 宋氏에게 그 光景을 말하니 宋氏는 精神이 없어 열일을 다 젔치고 돌아와 본즉 오직 비인 집뿐이다. 宋氏는 寢食을 全廢하고 千辛萬苦 孟烈의 行方을 捜探하다가 晋州로 가서 兵使 李景夏의 守廳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다시 晋州로 들어섰다. 이때에 孟烈이는 宋氏가 왔단 말을 듣고 兵使에게 말하여 「宋氏를 불러 소리를 시키되 吩咐하시기를 너는 本來 名唱이니 네가 소리를 하는데 能히 나를 한번 웃게 하고 또 한번 울게하면 賞給을 厚히 하려니와 만일 그렇지 못하면 네의 목숨을 바치리라 하시고 소리는 밧삭마른 兎鼈歌를 시키라고 하였다」 兵使는 그말대로 吩咐하였다. 宋氏가 생각한즉 이것은 분명 孟烈의 주촉이나 兵使의 吩咐라 거역할 수도 없어 그대로 소리를 하는데 아모리 웃기랴고 온갓 어리광이 짓을 다하여도 웃기는 고사하고 兵使의 얼굴에서는 점점 독살만 안개 피여오로듯 한다. 宋氏는 느닷없이 兵使의 앞으로 달여들면서 「아저씨 웨 아니 웃으시요 날를 죽이고싶어서」하였터니 兵使가 픽하고 웃섯다. 宋氏는 그것을 보고 물러서서 「우리 아저씨가 웃기는 하였다마는 또 어떻게 우는 꼴을 보나」하고 토끼 배 따는 대목에 가서 애원성으로 어떻게 슬프게 하였던지 滿座가 눈물바다를 일루웠는데 兵使도 돌아앉아서 한번 슬적 수건을 눈에 대었다 그리하여 소리판을 마친뒤에 孟烈이는 兵使에게 宋氏와의 前日關係를 숨김 없이 말하고 兵使의 諒解를 얻어가지고 다시 宋氏와 깨여진 거울을 마추웠다. 同居하든 中 晩年에 閒雲野鶴으로 餘生을 보낼가 하여 咸鏡道 吉州 地方 어느 勝地를 찾어가서 한동안 살었다. 氏 本來 性格이 異常할 뿐더러 그 傲慢하고 强怕한 點이 他人과 調和하기가 極히 困難하였다. 孟烈이 그 소리에 반하여서 같이 살기는 하나 性格의 不和할뿐아니라 그 乖悖한 뜻을 받기에는 너머 힘이 不足하였다. 畢竟은 서로 離緣하게 된 境遇이므로 孟烈은 憤激한 김에 보찜을 쌓가지고 영영 絶緣的으로 門을 박차고 나섰다. 그때 宋氏는 마음으로는 즉시 慰撫挽留하여서 다시 和解하기를 請할 생각이 간절하였으나 그 自負가 强하고 傲慢이 大甚한 性格이 이에 나지 아니하고 憎惡의 憤激과 孤獨의 悲哀가 一時에 幷發하였다. 愛人과 영영 別離하게 되매 그 悲痛의 感情을 斷腸曲으로 發함을 깨닫지 못하였다 「孟烈아 孟烈아 네 이년 잘 가거라 네가 간들 어쩔소냐 云云」하여 그 슬프고 외로웁고 애달고 사랑스럽고도 미운 感情을 餘地없이 發露하였다. 門밖에서 듣고 섰든 孟烈은 同感의 情을 이기지 못하여 다시 들어와서 서로 和解하고 말었다. 이것이 그 不知 不覺中에서 自歎歌로 부른것이 偶然히 진양조를 完成한 것이었다. 그가 悲曲을 잘 하였고 鬼哭聲에는 奪造化하였다 한다. 어느 때 晋州 矗石樓에서 판소리를 하는데 滿座는 모다들 느껴서 눈물을 禁치 못하였고 또는 四面이 寂寥한 깊은 밤인데 春香歌 中 獄中歌의 鬼聲을 發하는 대목에 이르러서 唱去唱來소리가 眞境에 돌어가매 陰風이 슬 돌면서 數十臺의 燭불이 一時에 탁 꺼지고 半空에서 鬼哭聲이 은은히 나는 듯하였다. 聽衆은 모다들 아울러 그 神技에 無不感歎하였다고 傳하는 것도 有名한 이야기다. 그의 唱法은 어떠하냐 하면 當時世人의 評과 같이 廬山瀑布 呼風煥雨의 格으로 하였다. 狂風이 大作兮여 高木이 折兮로다 라는 形狀으로 千兵萬馬가 뒤끌어 와서 天地振動하는 形狀으로 九龍飛瀑秋噴雪格으로 하는 式이다. 그러다가도 언제 그래든가 싶이 春風和暖에 百花爛漫格으로 돌아서는 式이었다고 한다.
氏의 長技로는 벤강수타령 春香歌 中 獄中歌 赤壁歌이다. 그 더늠으로 後世에 傳한 것은 左記 端歌이다.
「치어다보니 千峰萬壑 내려 구버보니 白沙地라 에구부러저 늙은 長松 狂風을 못 이기여 우줄 우줄 춤을 춘다. 느러진 반송 펑퍼진 떡갈 능수버들 오두자 뻤나무 황경피 물풀애 가는 댕댕 으름넌출 엉크러지고 뒤트러저 夕陽에 느러젔다 내금정 외금정 생보라매 수진이 떴다 보아라 종조리새 천리시내는 靑山으로 휘돌아 이골물이 뀔뀔 저골물이 주루룩 열의열두 골물이 한테로 합수처 천방자 지방자 방울저 얼턱저 건너 병풍석에 쾅쾅 부디처 벅큼이 북적 물소리 뒤따러 월이렁 꿜꿜 뒤동거려졌다 어디메로 가랴느냐」 朴萬順 倣唱 宋萬甲, 全道成 傳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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